정의

Thought 2015. 12. 25. 18:02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보면 우리의 가슴속에 하나 이상의 영웅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이라면 로봇 태권부이나 마루치 등의 티브이의 고전 만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일 것이고 지금 학생이나 청년들은 화려한 애니매이션의 가상의 인물이나 대형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접하는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시절 영웅을 선망했을까? 그리고 영웅을 다루는 작품들은 왜 끊임없이 만들어졌을까? 이런 모즌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과 우리가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동화에는 여러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일단 항상 주인공과 대비되는 악당이 존재한다. 그리고 두 인물은 숙명적으로 만나 싸움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러분이 봐왔던 대로 결국 대부분 주인공이 악을 물리친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구조를 보인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타인에게 해를 입히면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어려서 만화 속의 영웅들과 동일시를 꿈꾸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숙명적으로 전사의 기질을 타고 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던져진 사회에서 악함이 아닌 선함으로 분류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다수의 어린이는 집단 그리고 사회에서 요구되는 가치를 무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점이 있다. 영웅이란 악당의 존재로서 완성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악당이 존재하지 않으면 영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웅은 필연적으로 악당을 찾아 다닐 수 밖에 없다. 만약 영웅 놀이에 미쳐있는 사람이있다면 가상의 악을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영웅성을 유지하고 싶어 할 수고 있다. 그리고는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방에게 회복하지 못할 공격을 가할 것이다. 만약 전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성인이 되어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부모 그리고 어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회의 구성원들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없애기 위해서 말이다.

 우선 우리의 가치관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정의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정의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선뜻 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정의를 꿈꾼다. 자신이 정의롭게 살고 싶으며 정의로운 세상에서 존재하길 희망한다. 하지만 정의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의는 문자 그대로 ‘바른 듯’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르다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절대적으로 ‘바른 것’도 일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무 이유 없이 상대방의 목숨이나 신체 그리고 재산에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즉 과거 인권선언에서 제시되었는 자연권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연권도 국가의 위기 등 비상상태에서는 제한적으로 보호될 수 있다. 하여간 극히 제한된 경우를 제외하면 바르다는 표현은 상대적이다. 사회에서 사람은 대부분 자신에게 이익을 대변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정의는 상당히 모호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는가? 

 아쉽게도 현대 사회는 많은 분쟁이 존재한다. 그 중심에는 주로 자본이나 자원 그리고 종교나 이념 등이 있다. 자원이나 자본의 문제는 비록 쉽지 않지만 어느 정도 상대방과 서로 양보하면 타협하면 분쟁이 일부 조정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와 이념의 문제는 좀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이나 자원과는 다르게 선과 악의 그림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단 종교의 문제는 일부 극단주의의 문제이므로 이념의 갈등을 생각해 보자. 사회는 상당히 복잡하게 돌아가지만, 진보와 보수의 두 가지 이념을 대입하여 생각해보자. 평소에도 이 두 이념은 항상 대립한다. 아마도 신문의 정치면을 즐겨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선거를 앞두고 이 두 이념의 대변인들은 전투태세로 격상하고 상대방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소모적인 싸움을 한다. 그 싸움의 목적은 상대방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거나 사회를 병들게 하는병원균으로 보이게 하는 것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은 선이고 상대방은 악 혹은 무능력자로 만드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스스로가 영웅이 되어 승리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악당으로 만든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선거철만 되면 여러 편의 영웅 물이 각 지방에서 개봉되고 우리는 비싼 값을 주고 강제적으로 보게 되는 셈이다. 물론 인기가 없고 재미가 없는 영화가 대부분이고 그 관람 비용은 우리의 미래이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이런 소모적인 다툼이 우리가 사는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개인적인 의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깊게 알지 못하여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왕정 시대였던 조선 시대의 붕당정치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정치 세력들은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 그리고 북인과 남인 등으로 나뉘사 서로 물고 뜯는 진흙탕 싸움을 했다. 당시의 싸움 승패가 본인 그리고 가문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으니 그들에게서 나라의 국민을 위한 양보와 타협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자신을 노리는 들짐승과 동일시하지 않았을까? 결국, 그들은상대방이 권력을 가졌을 때는 상대방에게 고난과 핍박을 받았고 자신들에게 그 칼이 넘어왔을 때는 피의 복수를 자행했다. 나는 이러한 역사적 전통이 어쩌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의 정치권력을 보면 집권 후 화해와 대화보다 상대방에 힘을 과시하여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은 소외되고 이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을 더욱 강화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나는 그래서 본능적으로 정의를 부르짖으며 선과 악으로 세상을 이분하여 본인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정치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의를 앞세워 소모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여의도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전에 내가 겪은 일을 하나 예를 들어 보겠다. 얼마 전 아쉽게도 정부의 행정에 대해 많은 인원이 반대하는 집회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시위에서 한 노인이 크게 다쳐 국내외의 언론에서 집중 조명되었던 일이 있었다. 이 사건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누가 옳고 그르냐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이 안타까운 사건에서 내게 잊지 못할 한 가지 기억은 SNS에서의 사람들의 언쟁이다. 당시 많은 사람은 둘로 나뉘어서 정부와 시위대를 선과 악으로 나누고 싸우고 있었다. 그 들에 상대방의 의견을 짐승들의 소리로 치부하고 오직 자신의 말이 바르다고 우기며 정부와 시위대 중 누가 옳았는지를 이야기 했다. 마치 옳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면서 말이다. 나는 그 들에‘법적 책임이 있다면 사법부의 몫이고 도덕적 책임은 후에 역사를 접하는 후손들의 평가할 것이라고…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옳고 그름을 구분할 만큼 지혜롭지 않다.’고 부르짖었다. 나는 앞서 말한 제시한 것처럼 정의한 상대적인 것이며 추가로 우리에게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일부 사람들은 법치주의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나는 법이란 정의를 반드시 대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한 자연법을 제외하고 실정법 중 많은 것들은 다수의 국민의 합의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것이 불변하는 정의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나는 어렸을 때 정의를 추구하면서 정의로운 사람이 되길 소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오히려 큰 피해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정의를 위해 타인이나 공동체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솔직히 여기에 정해진 답은 없다. 개인이 수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사례가 될 수 있으므로 공유하고자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의 생각이 정답은 아니다. 나는 두 가지 가치를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먼저 제1의 가치는 진실이다. 허구 위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진실하지 않은 행동을 정의로 주장하는 것은 개인 혹은 집단의 고집에 불과할 수 있다.
 
 두 번째 가치는 선함이다. 여기서 선함이라는 것은 선과 악으로 구분된 이분법적인 사고의 선이 아니다. 혹시 여러분은 선함과 악함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 많은 철학자는 선과 악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 결과물인 자기 생각을 정리하였다. 중세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선에 부재로서 오는 결핍의 현상으로 보았다. 쉽게 이야기하면 빛의 부재를 어둠으로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선이란 무엇일까? 여기가 내가 많은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낸 지점이다. 과연 선함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답이 정답은 아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선하다는 표현을 언제 할까? 상대방이 자기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을 때? 아니면 부유한 부자가 자신에게 불필요한 일부를 가난한 자에게 줄 때? 아마도 둘 다 아닐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 있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할머니를 보고 도와주는 학생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자신도 먹을 것이 부족하지만, 옆에 굶고 있는 친구에게 빵을 양보하는 아이를 봤을 때 우리는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줄까? 아마도 여러분들도 나와 같이 착하다는 말을 해주었을 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예의 공통점을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의 몫을 희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도 필요하지만, 자신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양보하는 것이 선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선함이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이 세상이어서 욕심이 없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욕심을 이겨낼 자만이 선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함을 다시 생각해보다. 자기희생의 반대는 무엇일까? 아마도 자기애가 아닐까? 물론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자신을 보호하고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과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정도의 크기라면 어떨까?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적절한 자기애는 자아존중감에 도움을 주어 자아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극도의 자기애는 성격장애나 자만으로 변질하기 쉽다. 과거 가장 아름다움 천사였던 루시엘 이자만 하여 하나님과 같아 지려 하여 대적하여 타락천사인 루시퍼가 되지 않았는가? 만약 당신이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면 이 힘든 가시밭길을 가라고 권유하겠다. 

 나의 현재 삶의 목표는 진실을 추구하고 그 진실에 대해서 선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진실하고 선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때로는 거짓을 저지르고 자신을 위해 선택한다. 하지만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보다 실수를 반복해도 시도하는 것이 더 희망적이고 건설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진실과 선함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러분들이 나와 같은 삶을 꿈꾼다면 손에서 책을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자 한다. 나는 멋진 영웅이 세상을 구원하는 세상보다 영웅이 필요 없는 모두가 각자의 영웅인 그런 세상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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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스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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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Thought 2015. 12. 25. 17:37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오랜만에 국회의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방영했다. 평소에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 나지만 정치라는 주재를 다룬 작품이어서 1~2회 시청을 하였다. 처음에는 진상필이라는 주인공의 기존의 정치인답지 않은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퇴근 후 챙겨서 보았다. 하지만 몇 회흫 시청하고 난 후 진상필이라는 인물이 과연 국회의원으로 적합한 사람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문화적 흐름으로 이 드라마 그리고 진상필이라는 인물이 창조되게 되었는지고 생각해 보았다. 나의 이런 글이 그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던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 모르겠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 글을 비판적 사고로 읽고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분들이 있다면 같이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일단 진상필이라는 인물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므로 드라마의 주인공을 간단히 묘사하고자 한다. 주인공은 초선 국회의원이다. 그리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의 남자로 옳지 않을 일을 하는 사람에게 남녀노소,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는 길들지 않는 야생의 동물과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역구에 늙고 힘없는 노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의리남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은 아쉽게도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국회의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므로우리는 그에게 그렇게 열광했는지 모르겠다. 현실에서의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전혀 국민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진상필이라는 인물은 하나의 정치적 메시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처참한 현실을 해결해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에게 열광했고 안철수 국회의원에게 열광한 것은 아닐까?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영웅의 출현이 우리의 상황을 개선해 주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아무리 강한 영웅이라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없다면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즉 우리가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고 보다 나은 사람을 대표로 선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들이 새로운 미래를 여는 데 필요한 같이 생각해 보자. 

 우선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으로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인 나라이다. 즉 국민이 주인의 권리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개인의 권리는 공동체의 위협을 가하지 않는 범위 내에게만 가능하다. 또한, 공화정은 크기에 따라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로 나뉜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의 규모가 커서 일부 도시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대의민주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대표자를 쉽게 부패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대표자는 국민이 아닌 자신이나 일부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온 힘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 자신의 삶이 녹록지 않다면 자신을 대표하고 있는 국회의원의 행보를 지켜보길 권한다. 그 대표자가 자신의 더욱 나은 삶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더욱 지지하고 그렇지 않다면 다음 대표자를 선출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빠져있는 정치 혐오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많은 사람이 현재의 정치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그들 주 적지 않은 수는 국민의 기본적인 정치 참여인 투표도 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정치가 싫고 정치인에게서 환멸을 느낄 뿐이다. 물론 현재 국회에서 보이는 정치의 모습이 조기 좋치는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것들은 어쩌면 과거 그리고 현재의 국회의원들의 허물이 맞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의 자식이 잘못된 일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그들에게 나쁜 결과가 오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이민을 한다거나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들의 손에서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가 결정된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 입는 옷, 이용하는 대중교통이 모두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더욱 나은 세상을 소망한다면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정치를 바라봤으면 한다. 

 그리고 정치라는 단어를 바르게 사용하여야 한다.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다른 용도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만약 이 단어가 나은 방향으로 사용된다면 좋겠지만 반대의 경우가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 우선 가장 많이 쓰는 경우가 바로 ‘정치력이 있다’라는 말로 쓰인다. 정치력이란 '정치적인 역량이나 수완'이라는 뜻으로 주로 공동체 혹은 개인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공익의 개념이 아니라 개인의 성공을 위해 사용되므로 정치라는 단어가 개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가 있다그러므로 정치력이라는 표현하기 보다는 '수완이 좋다.’ 혹은 ‘특정 분야에 능력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옳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청소년들의 경우이다. 최근에 우연히 이동 전화로 컴퓨터 게임 관련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방송에서 ‘정치질’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여기서 정치질은 ‘이간질’이라는 의미 비슷하게 쓰이고 있었다. 자세히 설명하면 자신의 책임을 교묘하게 타인의 책임으로 돌려 싸움(분열)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이 경우는 정치라는 단어를 잘 못 사용한 것을 넘어서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정치에 대한 비관적인 고정관념을 가지고 성장한다면 우리에겐 희망은 없다. 적어도 정치란 단어는 가치 중립적인 단어이다. 그 앞에 어떤 단어가 붙는가에 따라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단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혹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정치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 인식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현재 정치인들의 문제점도 바로 이런 점이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자신과 상대방을 선과 악으로 이분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주장하느 정책은 바른 것이고 상대가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다투며 국민의 직접적인 행복을 위해서 힘을 하나로 모으지 않는다. 정치는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가 승리하기 위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끔 큰 선거의 결과나 특정 정치 조직의 정책이 추진괴는 것을 보고 스스로 승리에 도취된 정치인들을 보면 마음이 답답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짊어져야 할 국민들의 기대와 책임은 망각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정치는 오로지 국민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될 때 가치를 가진다. 올바른 정치인들의 태도는 자신의 주장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것이 더 국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스스로 내려놓는 모습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의견이 선택된 사람과 포기한 사람 모두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있기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정치인이라는 특정 조직에 관해서 이야기 했다. 하지만 우리도 정치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오프라인 환경보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서 일어난다.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상대방으로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날카로운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결국, 가상 공간에서의 싸움은 정신만 소모사는 파괴적인 언쟁으로 발전한다. 국회의 정치인들을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기 바란다. 우리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토론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을 가진 자를 대표자로 선출하여야 한다.

 이런 선과 악의 이분화된 구조는 한국 정치의 어두운 그림자다. 이런 것들은 대체로 이념 갈등, 지역 갈등 그리고 세대 갈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갈등은 국민을 분열시킨다. 가진 자와 없는 자, 자본가와 노동자, 영남과 호남,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로 국민을 분열시킨다. 그들은 제시된 대안을 깊이 있게 살펴보지 않고 상대방을 공격한다. 아쉽게도 국민의 이러한 분열을 과거 정치인들이 만든 산물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도덕적이지 못한 정치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이 그림자들을 이용할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상대방의 좋은 정책을 이념적, 지역적 그리고 세대간의 이유를 들어 국민을 선동하여 저지할 수 있다. 물론 분쟁이 전혀 발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한가지 생각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아마도 그 사회는 독재국가에 가까울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갈등은 건설적인 갈등과 파괴적인 갈등으로 나뉜다. 갈등을 통해 더욱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없다면 그것은소모적인 싸움일 뿐이다. 반면에 건설적인 갈등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합의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더욱 나은정치를 꿈꾼다면 우리나라에 만연해 있는 이념 갈등, 지역 갈등 그리고 세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정치의 방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여기서 방향성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큰 줄기라고 보면 좋겠다. 정치적 진보는 과거의 경험(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사건)에서 배운 것들을 통해 현재를 개선하여 더욱 나은 미래에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이러한 흐름을 막고 특정 시점에서 멈춰있거나 아니면 역행할 경우에는 긍정적인 미래를 만들 수 없다. 한국의 산업화 시절 고도의 경제 성장에 빠져있거나 현재만을 중시하여 미래의 흐름을 읽을 노력을 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다. 그리고 과거 자신의 잘못된 일들을 반성하지 않는 정치인에게서는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올바른 방향성을 가진 정책은 지속 가능하고미래 지향적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정책은 현재의 시점에 고정된 것들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미래는 암울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저출산이고 그로 인한 고령화 그리고 사회적 양극화이다. 지금이라도 미래 세대들을 위해서 지속할 수 있는 방향성을 가진 정치를 해야 한다

 아마도 여기까지 참고 끝까지 읽었다면 당신은 우리나라 정치에 많은 관심이 있거나 현재의 사회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솔직히 정치는 유쾌하지 않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환희의 순간보다 분노의 순간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정치에 결과물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우리가 스트레스를 감소하고서라도 우리의 대표자들을 바라보고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상필이나 다른 현실의 인물을 정치적 메시아로 기다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메시아로부터 얻는 평화는 영원하지 않다. 그 메시아가 떠나갈 수도 있고 다른 폭군이 그 뒤를 이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할 것인가? 나는 우리 스스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로 올바른 정치인의 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치인이 진정한 우리의 대표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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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스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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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Thought 2015. 12. 25. 16:56

 대학 원서를 작성하는 학생이나 직장을 구하는 구직자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는 것이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근본적인 고민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적인 고민이 그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위와 같은 고민을 하는 자녀나 지인이 있다면 '다 그런거야.'라는 무미건조한 위로를 건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재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주체가 모른다면 과연 누구한테서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현명한 답은 기다리면 저절로 나타날까?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다. 적어도 하루에도 수많은 행동을 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후에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미칠 영향이 나비효과로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위험한 것은 위의 의문을 가진 사람이 청소년이나 청년의 일시적인 고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저런 고민을 청소년이나 청년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수긍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이러한 안타까운 일이 다음 세대로도 자연스럽게 녹아 들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신에 대해 무지하게 된 걸까? 그 이유는 사춘기라는 현상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많은 어른은 청소년기 아이들이 어른의 말에 대항하는 것을 보고 '사춘기'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엄친아(혹은 엄친딸)를 둔 중년의 어머니들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우리 자식은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며 자랑을 하기도 한다. 사춘기는 단순히 폭력성이라는 표현을 한정하는 용어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인 개인적인 평가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해 감으로써 어른이 되어가는 과도기 단계이다. 그렇다. 사춘기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 건설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인생의 시기이다. 하지만 최근 많은 어른의 인식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혹시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진정한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에게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야!’라는 말을 하진 않았나?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등생이라는 지극히 어른 친화적인 목표와 좋은 대학이라는 근시안적인 목표를 강요하며 아이들에게 자신을 탐색하고 성장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왜 우등생이라는 단어가 어른 친화적인지 모른다거나 동의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같이 공부하고 어울리는 학생들은 자신과 혹은 친구들을 우등생이나 열등생의 기준으로 평가받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자아도취에 빠진 인원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오히려 학생들을 어른들의 방향대로 이끌기 위해 어떠한 이상향의 모습을 우등이라는 표현을 통해 강요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발달심리학자인 마샤의 정체성 지위 이론을 보면 정체성의 상태에 따라 4가지로 분리된다. 그 4가지 분리는 정체성에 탐색에 대한 위기의 경험했는가 여부와 주어진 과업에 얼마나 관여했는가의 여부로 결정된다. 4가지 상태 중 가장 하위 단계인 정체성 혼미는 위기도 없고 아무런 삶의 설계를 위한 아무런 욕구가 없는 단계로 가장 위험한 단계다. 물론 차후 상위 단계로 발전될 가능성은 있지만 그대로 방치된다며 부정적인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충분한 탐색 없이 빨리 정체성을 결정하는 정체성 유실이라는 단계가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부모님이나 주변의 과도한 개입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청소년기를 원만히 보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인기 이후 뒤늦게 정체성의 위를 겪을 수 있다. 다음은 삶의 목표와 같이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만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자신을 탐색하지 못하는 상황인 정체성 유예 상태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상태의 청소년들이 가장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충분한 자기탐색으로 통해 자아가 형성된 단계인 정체성 성취의 상태가 있다. 즉 건설적인 청소년기를 거치기 위해서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도전이 필요하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우리는 개인의 고민을 너무 쉽게 치부해 버린다. 높은 성적과 좋은 대학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의 아이들은 정체성이 완성되지 못한 채 불완전한 성인이 되어 간다. 실제로 국내 연구를 보면 서양의 청소년들보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정체성 유실이나 유예의 단계로 성인기에 접어든다고 한다. 

 어떤 어른들은 공부는 때가 있고 개인의 고민은 나중에 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나의 입시제도에서는 어른들의 충고만 믿고 공부만 한다면 차후에 입학원서를 쓸 때나 직업을 선택할 때 이 글의 앞에서 제시한 고민을 겪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다시 어떤 사람들은 원래 일이란 것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고 힘든 것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현재 상황은 지금 어른들이 청소년기에 자아탐색이 부족해서 겪는 부작용이 아닐까? 이러한 부작용을 다음 세대에게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옳을까? 나는 그래서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적어도 조금 더…한 걸음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미래는 아니겠지만 먼 미래에 다수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얼마나 멋진 모습일지 상상하면 나는 가슴이 설렌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청소년이 자아를 완성하게 도울 수 있을까? 내가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생각이 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긍정적인 대안을 될 거라 믿기에 제시해 볼까 한다. 혹시라도 내 의견에 오류가 있거나 동의하지 못한다면 간단한 의견을 주어도 좋다. 나는 현재의 교육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은 상당히 높다. 아마도 작은 국토에 많은 국민이 있고 불행히도 활용할 자원이 부족해서이겠지만 문제는 수준이 아니라 교육의 방향이다.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문을 배운다. 대표적으로 국어, 영어, 사회, 과학, 수학 등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봐야 할 것은 우리가 배우는 대상들이 다 우리 자신 외부의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물의 원소 기호도 배우고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많은 별도 배운다. 어려운 수학 공식도 외우고 열이나 운동을 이루어지는 원리도 공부한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는 과목 어디에도 우리 내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여기서 내부란 생물에서 다루는 신체 기관이 아니라 정신을 뜻한다. 정신이라고 하니 너무 모호하니 인문학 혹은 철학이라고 하자. 그나마 비슷한 도덕이나 윤리도 단순히 과거 철학자들의 명언이나 사상이 특징을 배우는 것이고 아쉽게도 이러한 교육의 목표가 개인의 자아 완성이 아니라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는 것이기에 이해보다는 암기 위주로 교육을 받게 된다.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에 어떠한 말을 했는지 외우는 것이 개인의 자아 형성에 어떠한 도움이 되겠는가? 개인적으로 도덕이나 윤리는 객관식 혹은 단답형의 시험이 아니라 논술의 형태 시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학년이 아닌 중, 고등교육 과정에서 말이다. 그리고 점수로 서열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합격 혹은 불합격으로 나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합격이란 정해진 방향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입장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쓰였는지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과거 성인들의 사상인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면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삶의 가장 적합한 사상이나 교훈들을 조합해서 자신만의 철학을 만드는 것 그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거나 책을 발간하지 않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말이다. 

 앞에서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하지 못한 성인이 많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굳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 않나 하는 물음이 생긴다. 그렇다. 정체성 형성의 부재는 우리가 지구 위에서 하나의 생물로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은 전혀 없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작성한 대본을 가지고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만약 너무 구체적이지 않아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왜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면 어떤 점이 변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절대적인 좋음과 그 반대가 존재할까? 간단한 예로 경차는 경제적이고 연비가 좋고 유지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 반면에 대형차는 안전하고 공간이 넓으며 활용도가 상대적으로 우수하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어떠한 사람이 차를 구매하게 된다면 자신의 구매 능력과 가족의 수 그리고 차의 활용 범위 등 다양한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월급이 2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값비싼 외제 차를 구매한다면 그는 행복할 수 있을까? 잠시의 기쁨은 있겠지만 곧 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충동구매로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우리는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은 행복하게 유지될 수 있다. 

 차를 구매하는 것도 우리는 이렇게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나아가는데 많은 정보가 필요할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한 시기가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국면일 것이다. 앞서 제시한 학생과 구직자의 경우가 해당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직업을 선택할 때 무엇을 고려할까? 안타깝게도 보수의 정도, 일의 평함, 일의 안정성 그리고 타인의 시선 등이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즉 자신에게 맞는 직업보다는 객관적으로 혹은 사회에서 더 좋다고 인정하는 직업을 고르게 된다. 그나마 이렇게 고를 수 있다면 사정이 좋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불균형이 심해져서 아무 일이라도 마저 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마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지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원활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사람이나 아니면 청소년기에 자신에 대한 충분한 탐색으로 통해 올바른 선택을 한 소수의 사람일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하므로 우리는 청소년들이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육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한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솜사탕을 만들 때의 나무젓가락과 같은 막대를 가지고 나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을 경험하고 보고 듣고 느끼게 된다. 그것들은우리가 수없이 겪는 지루한 것들 일 수도 있고 너무 충격적이어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여운을 주는 잊지 못할 사건일 수도 있다. 우리를 스쳐 가는 많은 것 중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주는 것은 우리가 가진 막대와 하나가 될 것이다. 이렇게 수년에서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가진 막대는 개인의 고유한 모양의 조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며 삶의 가치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형의 나뭇가지를 가지고 있거나 막대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조각을 가지게 되거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막대는 삶을 대하는 기준이나 태도 혹은 자아를 의미한다.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한 삶은 공허하며 허무하다. 지금 당신의 삶이 공허하거나 허무하다면 앞만을 주시하던 시야는 잠시 아래로 내려 두 손을 바라봤으면 한다. 나의 막대가 쥐어져 있는지 확인하길 바란다.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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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스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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