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Thought 2015. 12. 25. 16:56

 대학 원서를 작성하는 학생이나 직장을 구하는 구직자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는 것이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근본적인 고민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적인 고민이 그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위와 같은 고민을 하는 자녀나 지인이 있다면 '다 그런거야.'라는 무미건조한 위로를 건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재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주체가 모른다면 과연 누구한테서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현명한 답은 기다리면 저절로 나타날까?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다. 적어도 하루에도 수많은 행동을 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후에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미칠 영향이 나비효과로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위험한 것은 위의 의문을 가진 사람이 청소년이나 청년의 일시적인 고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저런 고민을 청소년이나 청년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수긍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이러한 안타까운 일이 다음 세대로도 자연스럽게 녹아 들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신에 대해 무지하게 된 걸까? 그 이유는 사춘기라는 현상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많은 어른은 청소년기 아이들이 어른의 말에 대항하는 것을 보고 '사춘기'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엄친아(혹은 엄친딸)를 둔 중년의 어머니들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우리 자식은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며 자랑을 하기도 한다. 사춘기는 단순히 폭력성이라는 표현을 한정하는 용어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인 개인적인 평가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해 감으로써 어른이 되어가는 과도기 단계이다. 그렇다. 사춘기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 건설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인생의 시기이다. 하지만 최근 많은 어른의 인식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혹시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진정한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에게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야!’라는 말을 하진 않았나?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등생이라는 지극히 어른 친화적인 목표와 좋은 대학이라는 근시안적인 목표를 강요하며 아이들에게 자신을 탐색하고 성장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왜 우등생이라는 단어가 어른 친화적인지 모른다거나 동의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같이 공부하고 어울리는 학생들은 자신과 혹은 친구들을 우등생이나 열등생의 기준으로 평가받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자아도취에 빠진 인원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오히려 학생들을 어른들의 방향대로 이끌기 위해 어떠한 이상향의 모습을 우등이라는 표현을 통해 강요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발달심리학자인 마샤의 정체성 지위 이론을 보면 정체성의 상태에 따라 4가지로 분리된다. 그 4가지 분리는 정체성에 탐색에 대한 위기의 경험했는가 여부와 주어진 과업에 얼마나 관여했는가의 여부로 결정된다. 4가지 상태 중 가장 하위 단계인 정체성 혼미는 위기도 없고 아무런 삶의 설계를 위한 아무런 욕구가 없는 단계로 가장 위험한 단계다. 물론 차후 상위 단계로 발전될 가능성은 있지만 그대로 방치된다며 부정적인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충분한 탐색 없이 빨리 정체성을 결정하는 정체성 유실이라는 단계가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부모님이나 주변의 과도한 개입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청소년기를 원만히 보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인기 이후 뒤늦게 정체성의 위를 겪을 수 있다. 다음은 삶의 목표와 같이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만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자신을 탐색하지 못하는 상황인 정체성 유예 상태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상태의 청소년들이 가장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충분한 자기탐색으로 통해 자아가 형성된 단계인 정체성 성취의 상태가 있다. 즉 건설적인 청소년기를 거치기 위해서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도전이 필요하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우리는 개인의 고민을 너무 쉽게 치부해 버린다. 높은 성적과 좋은 대학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의 아이들은 정체성이 완성되지 못한 채 불완전한 성인이 되어 간다. 실제로 국내 연구를 보면 서양의 청소년들보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정체성 유실이나 유예의 단계로 성인기에 접어든다고 한다. 

 어떤 어른들은 공부는 때가 있고 개인의 고민은 나중에 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나의 입시제도에서는 어른들의 충고만 믿고 공부만 한다면 차후에 입학원서를 쓸 때나 직업을 선택할 때 이 글의 앞에서 제시한 고민을 겪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다시 어떤 사람들은 원래 일이란 것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고 힘든 것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현재 상황은 지금 어른들이 청소년기에 자아탐색이 부족해서 겪는 부작용이 아닐까? 이러한 부작용을 다음 세대에게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옳을까? 나는 그래서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적어도 조금 더…한 걸음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미래는 아니겠지만 먼 미래에 다수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얼마나 멋진 모습일지 상상하면 나는 가슴이 설렌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청소년이 자아를 완성하게 도울 수 있을까? 내가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생각이 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긍정적인 대안을 될 거라 믿기에 제시해 볼까 한다. 혹시라도 내 의견에 오류가 있거나 동의하지 못한다면 간단한 의견을 주어도 좋다. 나는 현재의 교육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은 상당히 높다. 아마도 작은 국토에 많은 국민이 있고 불행히도 활용할 자원이 부족해서이겠지만 문제는 수준이 아니라 교육의 방향이다.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문을 배운다. 대표적으로 국어, 영어, 사회, 과학, 수학 등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봐야 할 것은 우리가 배우는 대상들이 다 우리 자신 외부의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물의 원소 기호도 배우고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많은 별도 배운다. 어려운 수학 공식도 외우고 열이나 운동을 이루어지는 원리도 공부한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는 과목 어디에도 우리 내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여기서 내부란 생물에서 다루는 신체 기관이 아니라 정신을 뜻한다. 정신이라고 하니 너무 모호하니 인문학 혹은 철학이라고 하자. 그나마 비슷한 도덕이나 윤리도 단순히 과거 철학자들의 명언이나 사상이 특징을 배우는 것이고 아쉽게도 이러한 교육의 목표가 개인의 자아 완성이 아니라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는 것이기에 이해보다는 암기 위주로 교육을 받게 된다.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에 어떠한 말을 했는지 외우는 것이 개인의 자아 형성에 어떠한 도움이 되겠는가? 개인적으로 도덕이나 윤리는 객관식 혹은 단답형의 시험이 아니라 논술의 형태 시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학년이 아닌 중, 고등교육 과정에서 말이다. 그리고 점수로 서열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합격 혹은 불합격으로 나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합격이란 정해진 방향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입장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쓰였는지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과거 성인들의 사상인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면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삶의 가장 적합한 사상이나 교훈들을 조합해서 자신만의 철학을 만드는 것 그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거나 책을 발간하지 않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말이다. 

 앞에서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하지 못한 성인이 많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굳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 않나 하는 물음이 생긴다. 그렇다. 정체성 형성의 부재는 우리가 지구 위에서 하나의 생물로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은 전혀 없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작성한 대본을 가지고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만약 너무 구체적이지 않아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왜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면 어떤 점이 변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절대적인 좋음과 그 반대가 존재할까? 간단한 예로 경차는 경제적이고 연비가 좋고 유지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 반면에 대형차는 안전하고 공간이 넓으며 활용도가 상대적으로 우수하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어떠한 사람이 차를 구매하게 된다면 자신의 구매 능력과 가족의 수 그리고 차의 활용 범위 등 다양한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월급이 2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값비싼 외제 차를 구매한다면 그는 행복할 수 있을까? 잠시의 기쁨은 있겠지만 곧 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충동구매로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우리는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은 행복하게 유지될 수 있다. 

 차를 구매하는 것도 우리는 이렇게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나아가는데 많은 정보가 필요할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한 시기가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국면일 것이다. 앞서 제시한 학생과 구직자의 경우가 해당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직업을 선택할 때 무엇을 고려할까? 안타깝게도 보수의 정도, 일의 평함, 일의 안정성 그리고 타인의 시선 등이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즉 자신에게 맞는 직업보다는 객관적으로 혹은 사회에서 더 좋다고 인정하는 직업을 고르게 된다. 그나마 이렇게 고를 수 있다면 사정이 좋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불균형이 심해져서 아무 일이라도 마저 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마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지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원활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사람이나 아니면 청소년기에 자신에 대한 충분한 탐색으로 통해 올바른 선택을 한 소수의 사람일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하므로 우리는 청소년들이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육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한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솜사탕을 만들 때의 나무젓가락과 같은 막대를 가지고 나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을 경험하고 보고 듣고 느끼게 된다. 그것들은우리가 수없이 겪는 지루한 것들 일 수도 있고 너무 충격적이어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여운을 주는 잊지 못할 사건일 수도 있다. 우리를 스쳐 가는 많은 것 중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주는 것은 우리가 가진 막대와 하나가 될 것이다. 이렇게 수년에서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가진 막대는 개인의 고유한 모양의 조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며 삶의 가치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형의 나뭇가지를 가지고 있거나 막대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조각을 가지게 되거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막대는 삶을 대하는 기준이나 태도 혹은 자아를 의미한다.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한 삶은 공허하며 허무하다. 지금 당신의 삶이 공허하거나 허무하다면 앞만을 주시하던 시야는 잠시 아래로 내려 두 손을 바라봤으면 한다. 나의 막대가 쥐어져 있는지 확인하길 바란다.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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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스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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