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Thought 2015. 12. 25. 18:02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보면 우리의 가슴속에 하나 이상의 영웅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이라면 로봇 태권부이나 마루치 등의 티브이의 고전 만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일 것이고 지금 학생이나 청년들은 화려한 애니매이션의 가상의 인물이나 대형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접하는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시절 영웅을 선망했을까? 그리고 영웅을 다루는 작품들은 왜 끊임없이 만들어졌을까? 이런 모즌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과 우리가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동화에는 여러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일단 항상 주인공과 대비되는 악당이 존재한다. 그리고 두 인물은 숙명적으로 만나 싸움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러분이 봐왔던 대로 결국 대부분 주인공이 악을 물리친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구조를 보인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타인에게 해를 입히면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어려서 만화 속의 영웅들과 동일시를 꿈꾸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숙명적으로 전사의 기질을 타고 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던져진 사회에서 악함이 아닌 선함으로 분류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다수의 어린이는 집단 그리고 사회에서 요구되는 가치를 무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점이 있다. 영웅이란 악당의 존재로서 완성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악당이 존재하지 않으면 영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웅은 필연적으로 악당을 찾아 다닐 수 밖에 없다. 만약 영웅 놀이에 미쳐있는 사람이있다면 가상의 악을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영웅성을 유지하고 싶어 할 수고 있다. 그리고는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방에게 회복하지 못할 공격을 가할 것이다. 만약 전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성인이 되어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부모 그리고 어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회의 구성원들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없애기 위해서 말이다.

 우선 우리의 가치관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정의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정의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선뜻 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정의를 꿈꾼다. 자신이 정의롭게 살고 싶으며 정의로운 세상에서 존재하길 희망한다. 하지만 정의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의는 문자 그대로 ‘바른 듯’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르다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절대적으로 ‘바른 것’도 일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무 이유 없이 상대방의 목숨이나 신체 그리고 재산에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즉 과거 인권선언에서 제시되었는 자연권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연권도 국가의 위기 등 비상상태에서는 제한적으로 보호될 수 있다. 하여간 극히 제한된 경우를 제외하면 바르다는 표현은 상대적이다. 사회에서 사람은 대부분 자신에게 이익을 대변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정의는 상당히 모호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는가? 

 아쉽게도 현대 사회는 많은 분쟁이 존재한다. 그 중심에는 주로 자본이나 자원 그리고 종교나 이념 등이 있다. 자원이나 자본의 문제는 비록 쉽지 않지만 어느 정도 상대방과 서로 양보하면 타협하면 분쟁이 일부 조정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와 이념의 문제는 좀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이나 자원과는 다르게 선과 악의 그림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단 종교의 문제는 일부 극단주의의 문제이므로 이념의 갈등을 생각해 보자. 사회는 상당히 복잡하게 돌아가지만, 진보와 보수의 두 가지 이념을 대입하여 생각해보자. 평소에도 이 두 이념은 항상 대립한다. 아마도 신문의 정치면을 즐겨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선거를 앞두고 이 두 이념의 대변인들은 전투태세로 격상하고 상대방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소모적인 싸움을 한다. 그 싸움의 목적은 상대방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거나 사회를 병들게 하는병원균으로 보이게 하는 것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은 선이고 상대방은 악 혹은 무능력자로 만드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스스로가 영웅이 되어 승리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악당으로 만든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선거철만 되면 여러 편의 영웅 물이 각 지방에서 개봉되고 우리는 비싼 값을 주고 강제적으로 보게 되는 셈이다. 물론 인기가 없고 재미가 없는 영화가 대부분이고 그 관람 비용은 우리의 미래이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이런 소모적인 다툼이 우리가 사는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개인적인 의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깊게 알지 못하여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왕정 시대였던 조선 시대의 붕당정치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정치 세력들은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 그리고 북인과 남인 등으로 나뉘사 서로 물고 뜯는 진흙탕 싸움을 했다. 당시의 싸움 승패가 본인 그리고 가문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으니 그들에게서 나라의 국민을 위한 양보와 타협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자신을 노리는 들짐승과 동일시하지 않았을까? 결국, 그들은상대방이 권력을 가졌을 때는 상대방에게 고난과 핍박을 받았고 자신들에게 그 칼이 넘어왔을 때는 피의 복수를 자행했다. 나는 이러한 역사적 전통이 어쩌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의 정치권력을 보면 집권 후 화해와 대화보다 상대방에 힘을 과시하여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은 소외되고 이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을 더욱 강화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나는 그래서 본능적으로 정의를 부르짖으며 선과 악으로 세상을 이분하여 본인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정치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의를 앞세워 소모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여의도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전에 내가 겪은 일을 하나 예를 들어 보겠다. 얼마 전 아쉽게도 정부의 행정에 대해 많은 인원이 반대하는 집회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시위에서 한 노인이 크게 다쳐 국내외의 언론에서 집중 조명되었던 일이 있었다. 이 사건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누가 옳고 그르냐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이 안타까운 사건에서 내게 잊지 못할 한 가지 기억은 SNS에서의 사람들의 언쟁이다. 당시 많은 사람은 둘로 나뉘어서 정부와 시위대를 선과 악으로 나누고 싸우고 있었다. 그 들에 상대방의 의견을 짐승들의 소리로 치부하고 오직 자신의 말이 바르다고 우기며 정부와 시위대 중 누가 옳았는지를 이야기 했다. 마치 옳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면서 말이다. 나는 그 들에‘법적 책임이 있다면 사법부의 몫이고 도덕적 책임은 후에 역사를 접하는 후손들의 평가할 것이라고…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옳고 그름을 구분할 만큼 지혜롭지 않다.’고 부르짖었다. 나는 앞서 말한 제시한 것처럼 정의한 상대적인 것이며 추가로 우리에게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일부 사람들은 법치주의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나는 법이란 정의를 반드시 대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한 자연법을 제외하고 실정법 중 많은 것들은 다수의 국민의 합의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것이 불변하는 정의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나는 어렸을 때 정의를 추구하면서 정의로운 사람이 되길 소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오히려 큰 피해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정의를 위해 타인이나 공동체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솔직히 여기에 정해진 답은 없다. 개인이 수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사례가 될 수 있으므로 공유하고자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의 생각이 정답은 아니다. 나는 두 가지 가치를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먼저 제1의 가치는 진실이다. 허구 위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진실하지 않은 행동을 정의로 주장하는 것은 개인 혹은 집단의 고집에 불과할 수 있다.
 
 두 번째 가치는 선함이다. 여기서 선함이라는 것은 선과 악으로 구분된 이분법적인 사고의 선이 아니다. 혹시 여러분은 선함과 악함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 많은 철학자는 선과 악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 결과물인 자기 생각을 정리하였다. 중세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선에 부재로서 오는 결핍의 현상으로 보았다. 쉽게 이야기하면 빛의 부재를 어둠으로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선이란 무엇일까? 여기가 내가 많은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낸 지점이다. 과연 선함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답이 정답은 아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선하다는 표현을 언제 할까? 상대방이 자기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을 때? 아니면 부유한 부자가 자신에게 불필요한 일부를 가난한 자에게 줄 때? 아마도 둘 다 아닐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 있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할머니를 보고 도와주는 학생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자신도 먹을 것이 부족하지만, 옆에 굶고 있는 친구에게 빵을 양보하는 아이를 봤을 때 우리는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줄까? 아마도 여러분들도 나와 같이 착하다는 말을 해주었을 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예의 공통점을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의 몫을 희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도 필요하지만, 자신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양보하는 것이 선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선함이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이 세상이어서 욕심이 없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욕심을 이겨낼 자만이 선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함을 다시 생각해보다. 자기희생의 반대는 무엇일까? 아마도 자기애가 아닐까? 물론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자신을 보호하고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과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정도의 크기라면 어떨까?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적절한 자기애는 자아존중감에 도움을 주어 자아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극도의 자기애는 성격장애나 자만으로 변질하기 쉽다. 과거 가장 아름다움 천사였던 루시엘 이자만 하여 하나님과 같아 지려 하여 대적하여 타락천사인 루시퍼가 되지 않았는가? 만약 당신이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면 이 힘든 가시밭길을 가라고 권유하겠다. 

 나의 현재 삶의 목표는 진실을 추구하고 그 진실에 대해서 선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진실하고 선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때로는 거짓을 저지르고 자신을 위해 선택한다. 하지만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보다 실수를 반복해도 시도하는 것이 더 희망적이고 건설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진실과 선함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러분들이 나와 같은 삶을 꿈꾼다면 손에서 책을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자 한다. 나는 멋진 영웅이 세상을 구원하는 세상보다 영웅이 필요 없는 모두가 각자의 영웅인 그런 세상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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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스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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